사랑의 온도를 초반까지만 본 후

어릴 때 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초등학생 때 이문열 삼국지를 읽었다. 10권까지 다 읽었다. 충격을 받았다. 사실 9권부터 조짐은 있었다. 9권부터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들이 하나씩 죽어나갔다. 조자룡이랑 제갈공명이 죽었을 때는 책을 읽는게 힘들었다. 꾸역꾸역 읽었다. 결말은 사마가문의 누군가가 통일을 하며 끝났던 것 같다. 기억이 잘 안난다. 그게 뭣이 중한가. 그 뒤로 삼국지를 읽을 기회가 몇 번 더 있었다. 9권과 10권에 해당하는 부분은 항상 읽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거의 권선징악에 가까운 책들만 읽어왔다. 선하다고 믿던 주인공이 죽는 경우는 없었다. 그 당시 좋아하던 캐릭터가 죽은 또다른 작품으로는 드래곤볼이 있지만 드래곤볼 세계관에서는 사실 죽으나 사나 별 차이가 없다. 머리 위에 원을 띄워놓고 다닌다는 것 외에 살아있는 사람과 똑같이 행동한다. 
초등학생 6학년이었나 내 남자친구에게라는 책을 읽었다. 인터넷 소설 원작이다. 거기서도 주인공 남자가 죽었다. 내 남자친구에게는 귀여니 작품이다. 지금은 귀여니라는 작가와 그 작품에 대한 존재가 거의 잊혀진 것 같다. 귀여늬는 성대 교수가 됐다고 들었다.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어쨌든 혼자 힘으로 새 장르를 개척한 사람이다. 귀여니에 대한 호불호나 평가는 다양하다. 귀여니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한다. 맞춤법부터 시작해서 소설의 개연성까지. 그 비판에 다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까서는 안되는 귀여니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로 하여금 자기 소설의 캐릭터들에게 감정이입을 시키는 힘은 신파 여부를 떠나서 최고다. 남자주인공이 죽을 때 초등학생인 난 정말 많이 울었다. 30살 전후인 지금까지도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다. 아무튼 그 뒤로 내 남자친구에게를 몇 번 더 읽었지만 주인공이 죽을 때쯤이면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중학생 때는 이영도 소설에 빠져 살았다. 이영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아직까지도 책이 나오면 나를 자동으로 구매하게 하는 힘이 있다. 처음 읽은게 드래곤라자다. 중학생 때 만화방에서 3권을 빌리고 그다음날까지 다 읽었다. 바로 다음 3권을 빌려왔다. 지금은 양장본 8권으로 되어있지만 그 때는 12권이었다. 12권을 다 읽는데 4일이 걸렸다. 잠도 잘 안자고 수업도 잘 안듣고 읽었다. 모든 캐릭터를 다 좋아했지만 특히 길시언이라는 왕자와 운차이라는 간첩을 좋아했다. 길시언은 12권에서 죽는다.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드래곤라자는 10번을 넘게 읽었는데 12권은 처음 읽을 때 한 번 외에는 읽은 적이 없다.
대학생 때 김종욱 찾기 영화를 봤다. 임수정이랑 공유가 여행을 가는데 호두과자인가를 임수정이 1개 남기고 먹지 않았다. 공유가 왜 안먹느냐고 묻자 임수정은 자긴 끝을 보는게 싫다고 원래 하나씩 남긴다고 했다. 너무 이해가 갔다. 임수정을 원래 좋아했지만 그 장면 이후 더 좋아했다. 물론 영화 마지막에서 공유가 끝을 보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임수정에게 외치고 임수정은 자기 첫사랑의 끝을 본다. 조금 배신감이 들었지만 어쨌든 임수정과 공유가 잘 되는 훈훈한 영화다.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내 습관 탄생의 이유다. 난 드라마나 책을 볼 때 끝을 잘 보지 않는다(의도치 않게 스카이캐슬 승자가 되었다). 중간에 시시해져서 안 보는 경우는 논외로 하고, 좋아하던 작품도 끝을 보면 서운한 감정이 든다. 특히 끝에 다다를때쯤 내가 아끼던 캐릭터가 잘못되면 하... 현실의 내 기분에 영향을 미친다. 끝을 보고 안좋았던 경험들이 쌓여서 난 끝을 보지 않는 습관을 갖게 됐다(물론 일관성있는 습관은 아니다, 끝을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제 슬슬 제목에 써진 사랑의온도 이야기를 해야겠다. 서현진이 나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이기에 이것만으로도 많은 기대를 갖고 봤다. 심지어 양세종도, 김재욱도 잘생겼다. 이제 한 10화까지 봤다. 18화로 환산하면 5화까지 본 셈이다. 현재까지 너무 만족한 상태다. 그래서 (마지막을 안 보게 될 수도 있기에) 뭐라도 남겨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온도는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서 보는 것 이상의 만족을 안겨줬다. 특히 BGM과 화면표현이 너무 마음에 든다. 검블유의 박모건 게임테마곡 같은 곡이다. 가사는 없다. 주인공들이 사랑이라고 느꼈던 순간에 주로 흘러나오는 것 같다. 타자로 표현하면 따라라따따라따따따라따따 이정도 느낌의 곡이다. Love Step(오준성)이라는 BGM인데 들을 때마다 주인공들의 설렘이 그대로 전달된다. 이 음악이 나올 때 주인공들이 흑백으로 잠깐 보여지는 경우가 많다. 아마 현재의 시점에서 되돌아보았을 때 그건 사랑이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 같다. 뭐가 됐든, 화면과 BMG이 너무 예쁘다. 색감이 예쁘다는게 아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색감이 예쁜 영화였다면 이 드라마는 관계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 예쁘다. 그 분위기랄까. 물론 색감도 예쁜 편이다. 
캐릭터들도 마음에 든다. 전반적으로 다들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대화한다. 몇몇 빌런들은 있지만 주된 캐릭터들은 다 차분하다. 그 와중에 대사는 또 티키타카가 잘 된다. 차분한 장난, 서로를 보호해주는 말장난이다. 보고 있으면 나도 안정감이 든다. 드라마를 보는데 진을 빼지 않아서 좋다. 잔잔하게, 주말 아침에 보면 어울릴 것 같은 드라마다. 
이미 종영된지 꽤 지난 드라마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읽어보니 후반으로 갈수록 고구마였다는 의견이 많다. 뭔가 이런 느낌으로 계속 간다면 답답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다행히 새드엔딩은 아닌 것 같다. 아마 팬심에서라도 이번 드라마는 끝까지 볼 것 같지만 언제 또 나를 힘들게하는 장면이 나올지 모른다. 후반의 고구마에 나도 지쳐버릴 수 있다. 그래서 허겁지겁 간단한 후기를 남긴다. 앞으로 드라마를 보며 생각이나 판단이 시시각각 변하겠지만 아직까지는 너무 행복하게 시청하고 있다.

다 쓰고 나니 사랑의 온도 앞의 삼국지, 내 남자친구에게, 드래곤라자, 김종욱찾기 이야기를 왜 썼나싶다.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TMI같기도 하고. 하지만 왜 내가 다 보지도 않은 드라마를 쓰는지에 대한 변명이 되어준다고 믿는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