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 극락왕생

나는 사실 오타쿠...인가? 티스토리에서 이 질문을 다룬 적은 없다. 오타쿠여도 상관은 없다. 어릴 때는 오타쿠가 이상했다. 요즘은 아무 생각이 없다. 특별한 차이를 못 느낀다. 뭐가 됐든 오타쿠는 아닌 것 같다. 진정한 오타쿠라는게 존재한다면 나는 덕력이 너무 약할 것이다. 진정한 오타쿠가 거부할 것 같다. 너는 아직 부족하다. 나는 그냥 만화를 좋아하는 수준인데 만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딱히 있나 싶다. 

아무튼 내 몇 안되는 취미 중 알라딘 추천마법사 들어가기가 있다. 심심할 때 알라딘 어플을 키고 책을 추천받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구입한 책을 알라딘이 분석해서 내가 좋아할만한 신간을 알려준다. 주말에도 추천마법사를 보고 있는데 표지가 알록달록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추천받는 책은 대부분 사회과학 책이다. 사회과학 책은 화려한 경우가 별로 없다. 책 디자인이 아무리 다양해졌다지만 뭔가 분야별로 공유하는 원칙은 있을 것이다. 사회과학 책은 조금은 있어보이는 디자인이 원칙인 것 같다. 너무 가벼워보이지 않는 디자인. 즉 알록달록한 이 책이 사회과학서적일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제목도 극락왕생인걸. 알록달록 책을 클릭했다. '2019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수상'이란 화려한 수식어가 있었다. 리뷰를 보니 호평이 가득했다.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리뷰까지 있었다. 책 소개를 보니 약간의 불교 세계관이 섞여 있는 듯 했다. 극락왕생이라는 말 자체가 불교쪽에서 많이 사용할법한 용어다.

갑작스러운 고백을 해보자. 나는 이런 류의 책에 약하다. 이런 류란 약간의 종교적세계관 & PC함(요즘은 한물간 정치적 올바름) & 신비함 등의 요소를 말한다. 샀다. 마이너스통장이 한도 5,000만원에 도달하기까지 100만원도 안 남아서 조금 고민했지만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돈은 어떻게든 되겠지. 

책이 왔다. 바로 읽었다. 주인공은 (아직까지는) 두 명이다(3권까지 계획 되어있다는데 아직 1권까지밖에 발행이 안됐다). 도명과 박자언. 박자언은 귀신이다. 도명은 지옥을 관장하는 지장보살 아래서 일하는 호법신이다. 호법신은 그냥 직책정도로 생각하자. 박자언은 합정역에서 당산역을 향해가는 2호선 지하철에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을 볼 수 있는 인간을 찾는다. 찾은 인간에게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를 부르라고 시킨다. 사실 이게 문제되는 행동은 아니다. 노래를 부르는 인간은 그저 귀신을 못보는 다른 사람들에게 쪽팔릴 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극락왕생의 세계관에서 박자언은 지상을 관장하는 관음보살의 영역에 있는 귀신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이야기가 진행이 안된다. 지장보살의 영역 아래 있는 도명은 관음보살 영역에 권한이 없음에도 박자언을 잡으러 간다. 그리고 관음보살에게 걸린다. 관음보살은 박자언에게 인간으로 살 기회를 다시 준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도명에게는 그런 박자언을 1년간 따라다니게 한다. 박자언이 왜 귀신일 때 그런 행동을 했는지 찾고 박자언을 1년 안에 극락왕생 시키는 임무가 주어진다. 다시 살게 된 박자언은 자신의 고등학교시절로 돌아간다. 그러나 한 번 죽었다 부활? 환생? 아무튼 이런 삶이 평범할리 없다. 박자언 눈에는 온갖 귀신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박자언은 귀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민을 함께해주기 시작한다. 스토리는 대충 이정도다(중간 중간 나오는 깨알같은 작가의 개그포인트는 정말 내 취향이다).

사실 다 읽지도 않은 이 만화를 굳이 다룬건 내용보다는 그림체와 뒤에 있는 작가의 말 때문이다(라고 말은 하지만 원래 난 다 안보고 글 쓴 적이 많다. 드라마 사랑의 온도도 초반만 보고 글을 썼었다. 이쯤에서 소환해보자. 사랑의 온도.)

2020/12/20 - [대본&소설&일기] - 사랑의 온도를 초반까지만 본 후

사랑의 온도를 초반까지만 본 후

아무튼 극락왕생을 보며 다시 한 번 앞으로 돌아가 확인하게 된 장면이 있다. 1년의 삶을 다시 받은 박자언과 도명이 여고를 다니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림체를 보고 두 캐릭터가 당연히 남자일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박자언이라는 이름이 성별 구분이 저절로 되는 이름은 아니다. 그리고 교복을 입기 전 말투나 옷차림을 보았을 때도 당연히 남자라고 여겼다. 하지만 작가 고사리박사는 '굳이' 그 둘에게 치마를 입힌다. 그 둘의 덩치도 만화에서 흔히 기대되는 여성의 덩치는 아니다. 얼굴형이나 생김새도 남성인지 여성인지 잘 분간이 안간다.

처음에는 고사리박사의 취향인가 생각했다. 그러다 책 뒤에 부록마냥 있는 독자님들께 쓰는 편지를 읽고 생각을 바꿨다. 고사리박사는 '자신이 연재 당시 화가 많이 나 있었고 온 세상이 여자들의 소리없는 슬픔과 우레같은 고함으로 엎어졌다 쓸려나가길 반복한 한 해였다고, 혜화역에 모인 여자들의 눈동자를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썼다. '그 눈동자들이 자신의 세상을 통째로 뒤집어 놓았다'고도 했다. 여기까지 읽고나니 작가의 그림체나 대사, 말투 등은 (전부 내 뇌피셜이긴하지만) 의도한 바임에 틀림없다. 뇌피셜을 이렇게 강하게 확신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확신한다.

고사리박사에게 고맙다. 당연스레 여겨지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부수는 이런 시점. 극락왕생이 3권까지 나올 계획이라면 내가 읽은 것은 아직 1/3에 불과하다. 그래서 내용이 어떻다고 말하는건 조금 성급한건 같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여성들의 작품을 그려내는 분이 아직 한국에는 많지 않다. 만화 자체는 연재가 다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관점과 그림체, 세계관을 작품이 끝날 때까지 가져가주기를 바란다. 2권과 3권이 출간되면 마통 한도를 늘려서라도 사보겠다. 끝.